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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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는 1906년 리야드에서 태어난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으로, 초기에는 헤자즈 총독과 외무장관을 역임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1953년 왕세자가 되었고, 1964년 사우드 국왕을 폐위시키고 국왕으로 즉위하여 근대화 개혁, 경제 개발,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위한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석유 파동을 주도하며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1975년 조카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파이살 국왕 재단이 설립되었고, 여러 기념물과 저술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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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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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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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파이살 |
전체 이름 |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빈 압둘 라흐만 |
로마자 표기 | Fayṣal ibn ʿAbd al ʿAzīz Āl Suʿūd |
아랍어 표기 | فيصل بن عبدالعزيز آل سعود |
IPA 표기 | fæjsˤɑl ben ˈʕæbd ælʕæˈziːz ʔæːl sæˈʕuːd |
출생일 | 1906년 4월 14일 |
출생지 | 리야드, 리야드 토후국 |
사망일 | 1975년 3월 25일 |
사망지 | 리야드, 사우디아라비아 |
매장일 | 1975년 3월 26일 |
매장지 | 알우드 묘지, 리야드 |
직업 | 정치가 외교관 |
통치 | |
칭호 | 두 성지의 수호자 |
국왕 즉위 | 1964년 11월 2일 |
국왕 퇴위 | 1975년 3월 25일 |
즉위식 | 1964년 11월 2일 |
즉위 형태 | 바이아 |
선임 국왕 | 사우드 |
후임 국왕 | 칼리드 |
섭정 | 1964년 3월 4일 – 1964년 11월 2일 |
섭정 군주 | 사우드 |
총리 재임 (1차) | 1954년 8월 16일 – 1960년 12월 21일 |
총리 선임 (1차) |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
총리 후임 (1차) |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
총리 재임 (2차) | 1962년 10월 31일 – 1975년 3월 25일 |
총리 선임 (2차) |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
총리 후임 (2차) | 칼리드 빈 압둘아지즈 |
왕세자 | 1953년 11월 9일 – 1964년 11월 2일 |
왕세자 군주 | 사우드 |
왕세자 선임 |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
왕세자 후임 | 칼리드 빈 압둘아지즈 |
외무부 장관 재임 (1차) | 1930년 12월 19일 – 1960년 12월 22일 |
외무부 장관 군주 (1차) | 압둘아지즈 사우드 |
외무부 장관 선임 (1차) | 사무실 설립 |
외무부 장관 후임 (1차) | 이브라힘 빈 압둘라 알 수와이엘 |
외무부 장관 재임 (2차) | 1962년 3월 16일 – 1975년 3월 25일 |
외무부 장관 군주 (2차) | 사우드 본인 |
외무부 장관 선임 (2차) | 이브라힘 빈 압둘라 알 수와이엘 |
외무부 장관 후임 (2차) | 사우드 알 파이살 |
헤자즈 총독 | 1926년 2월 9일 – 1932년 9월 22일 |
헤자즈 총독 군주 | 압둘아지즈 |
헤자즈 총독 후임 | 칼리드 빈 압둘아지즈 |
군사 경력 | |
소속 | 사우디아라비아군 |
복무 기간 | 1919–1975 |
참전 전투 | 사우디아라비아 통일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부라이미 분쟁 북예멘 내전 알와디아 전쟁 6일 전쟁 욤 키푸르 전쟁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술타나 빈트 아흐메드 알수다이리 이파트 빈트 모하마드 알투나얀 알자우하라 빈트 사우드 알카비르 하야 빈트 투르키 알투르키 헤사 빈트 무함마드 알무한나 아바 알카일 무니라 빈트 수하임 알투나얀 알마하셰르 파티마 빈트 압둘아지즈 알샤흐라니 |
자녀 | 압둘라 왕자 사라 공주 무함마드 왕자 사우드 왕자 칼리드 왕자 압둘 라흐만 왕자 사드 왕자 반다르 왕자 투르키 왕자 롤로와 공주 하이파 공주 |
가문 | 사우드 가문 |
아버지 |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
어머니 | 타르파 빈트 압둘라 알셰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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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와 교육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는 1906년 4월 14일 리야드(Riyadh)에서 태어났다.[6][7] 그는 당시 네즈드(Nejd)의 에미르였던 아버지 압둘아지즈 빈 압둘라흐만(Abdulaziz bin Abdulrahman)의 세 번째 아들이었으며, 리야드에서 태어난 아들 중에서는 첫째였다.[8][9] 그의 어머니 타르파 빈트 압둘라 알 셰이크(Tarfa bint Abdullah Al Sheikh)는[10]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Muhammad bin Abdul Wahhab)의 후손으로,[11] 압둘아지즈가 1902년 리야드를 점령한 후 결혼했다. 파이살의 외할아버지 압둘라 빈 압둘라티프 알 셰이크(Abdullah bin Abdullatif Al Sheikh)는 아버지 압둘아지즈의 주요 종교 교사이자 고문 중 한 명이었다.[12][13] 파이살에게는 누라(Noura)라는 친누나가 있었는데, 그녀는 압둘아지즈의 이복형제인 무함마드 빈 압둘 라흐만(Muhammad bin Abdul Rahman)의 아들 칼리드 빈 무함마드 알 사우드(Khalid bin Muhammad Al Saud)와 결혼했다.[14]
어머니 타르파는 파이살이 태어난 지 여섯 달 만인 1906년에 세상을 떠났다.[12] 이후 그는 외조부모인 압둘라 빈 압둘라티프와 하야 빈트 압둘 라흐만 알 무크벨(Haya bint Abdul Rahman Al Muqbel) 밑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다.[15][12] 외할아버지의 지도로 파이살은 아홉 살에 코란 암송과 이슬람법 및 교리 공부를 마쳤다.[16] 또한 아버지로부터는 승마와 정치를 배웠다. 아버지 압둘아지즈는 그에게 군사적, 정치적으로 영향을 주었으며, 어린 나이에도 국제적인 자리에서 아버지를 대신하도록 선택했다.[16]
헬렌 채핀 메츠(Helen Chapin Metz)에 따르면, 파이살과 그의 세대는 용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에서 성장했다.[17] 1916년부터는 여러 정부 직책을 역임한 하피즈 와흐바(Hafiz Wahba)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18][19]
3. 초기 정치 경험
아버지 압둘아지즈 국왕의 아들로서 파이살은 여러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1919년, 영국 정부가 압둘아지즈 국왕을 런던으로 초청했으나[20] 국왕은 직접 갈 수 없었다. 대신 장남인 투르키 왕자를 보내려 했지만,[20] 투르키 왕자가 방문 직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면서[20] 파이살이 대신 런던으로 파견되었다. 이로써 파이살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족 중 최초로 영국을 공식 방문한 인물이 되었다.[20] 그는 5개월간 영국에 머물며 영국 관리들과 만났다.[21] 같은 해에 프랑스도 방문했는데, 이 역시 사우디 왕족으로서는 최초의 공식 방문이었다.[22]
파이살은 군사적인 역할도 맡았다. 압둘아지즈 국왕은 아라비아 반도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파이살에게 여러 군사 작전을 지휘하도록 했다. 1922년 하일 지역 점령과 아시르 지역의 초기 장악 이후, 파이살은 약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 지역들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 해 말 아시르 지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했다.[23]
3. 1. 헤자즈 총독과 외무장관
파이살 왕자는 아버지가 헤자즈 지역을 장악한 후인 1926년 2월 9일 헤자즈 총독으로 임명되었다.[24][25][26] 그는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지역 지도자들과 자주 협의했다.[27] 또한 자문회의 의장이자 내무부 장관을 겸임했다.[28]
1931년 12월, 대의원회(ara) 헌법 발표 후에는 4인 위원회 의장 겸 외교부 장관이 되었다.[28] 이후 1960년부터 1962년까지 2년간의 공백기를 제외하고는 사망할 때까지 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교 정책을 총괄했다.[25] 외무장관 재임 중 파이살은 여러 국가를 방문했는데, 1932년 5월에는 이란[30], 같은 해 폴란드, 1933년에는 러시아를 방문했다.[31][32] 1932년 7월 8일에는 터키를 방문하여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33]
1932년 9월 23일, 파이살 왕자는 메카의 알 함디야 궁전에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실칙령을 낭독했다. 이 칙령은 헤자즈와 네즈드 왕국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개칭하는 내용으로, 공식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을 선포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34][35]
파이살은 군사적인 역할도 수행했다. 그는 1934년 사우디-예멘 전쟁에서 사우디 군의 작전을 지휘하여 승리를 이끌었다.[25] 또한 외교 활동도 이어갔는데, 1943년 10월에는 이복형제인 할리드 왕자와 함께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다.[36]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 간의 초기 주요 접촉 중 하나로 기록된다.[36]
4. 왕세자와 총리
1953년 아버지 압둘아지즈 국왕이 사망하자 왕세자가 되었고, 1954년에는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왕이 된 형 사우드와의 권력 갈등으로 인해 1960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가, 1962년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다.[50]
총리 복귀 후 파이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현대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1962년 11월 26일, 그는 다음과 같은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정책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는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통치의 기본 방향이 되었다.
# 코란과 순나를 국가 법률 및 행정의 기반으로 삼는다.
# 지방 행정 제도를 확립한다.
# 사법부(사법성)와 최고 사법 회의를 설립한다.
# 파트와(종교적 칙령) 공포 기구를 설립한다.
# 언행을 통해 이슬람을 전파한다.
# 이슬람 정신에 따라 선행을 장려하고 악행을 단속한다.
# 무상 의료 및 교육 서비스 제공, 저렴한 기본 식량 공급, 사회 보험 사업단 설립 등 사회 복지를 증진한다.
# 경제 및 사회 개발을 촉진한다.
# 도로, 댐 건설 등 인프라 프로젝트와 수자원 개발을 시행하고, 중공업 및 경공업 개발, 석유 및 광물 자원 공단 설립을 추진한다.
#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노예를 해방한다.
이러한 개혁 정책 발표는 파이살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 운영의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4. 1. 사우드 국왕과의 갈등

아버지 압둘아지즈 국왕 사후, 형인 사우드 국왕과 파이살 사이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 기간 동안 사우드 국왕과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사우드는 국가를 심각한 부채에 빠뜨렸으며, 아랍연합공화국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왕실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렸다.[50] 이에 왕족들은 회의를 열어 파이살에게 사우드로부터 실질적인 통치권을 장악하라고 요구했다.
1963년 초,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파이살은 사우드가 건강 문제로 해외에 체류하는 틈을 타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는 사우드의 충신들을 여러 직위에서 해임하고, 이복동생인 압둘라 왕자와 같이 자신의 편에 선 왕족들을 군 및 안보 요직에 임명했다.[51][52] 이미 1962년에 파이살은 압둘라에게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방위군 사령관직을 맡긴 바 있었다. 귀국한 사우드는 파이살의 조치들을 거부하고 자신의 모든 권한 회복을 요구했다.[50]
이에 파이살은 사우드를 제외한 모든 왕족 고위 인사들과 율마(이슬람 법학자), 부족 원로들을 소집했다.[50] 회의는 파이살을 지지했으며, 사우드를 폐위시키고 파이살을 국왕으로 선포할 것을 제안했다. 파이살의 외가 사촌이자 사우디아라비아 대무프티인 무함마드 이븐 이브라힘 알 아쉬-셰이크는 사우드 국왕에게 파이살의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파트와(종교적 칙령)를 발표했다.[50] 그러나 파이살은 아버지에게 사우드를 국왕으로 인정하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사우드가 왕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사우드가 권력을 넘겨주고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51]
권력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사우드는 왕실 근위대에 나스리야 궁 방어를 명령했지만, 파이살은 국가방위군에게 사우드의 궁궐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50] 충성스러운 병력이 적고 무장도 부족했던 사우드는 결국 굴복했고, 1964년 3월 4일 파이살이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말, 왕족 원로들과 율마들의 회의가 다시 열렸고, 대무프티는 사우드의 지속적인 건강 악화를 이유로 왕위를 동생에게 넘기라는 두 번째 파트와를 발표했다. 파이살은 이를 통해 이전의 맹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겼다.[53] 왕실은 파트와를 지지하고 즉시 사우드에게 결정을 통보했다. 모든 권력을 잃은 사우드는 동의했고, 파이살은 1964년 11월 2일 국왕으로 선포되었다.[42][52] 이후 사우드는 망명길에 올라 이집트를 거쳐 그리스에 정착했다.[130]
한편, 파이살은 국왕이 되기 전인 1962년, 총리로서 노예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노예 제도가 완전히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BBC 진행자 피터 홉데이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노예 한 명당 2000USD를 지불했으며 약 1,682명의 노예가 해방되었다.[93] 정치 분석가 브루스 리델은 1945년 압둘아지즈 국왕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회담 이후 미국이 노예 제도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으며,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2년 사우드 왕가를 설득하여 노예 제도를 폐지하게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54]
5.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형 사우드 국왕과의 권력 갈등 끝에 왕족과 율마(이슬람 법학자)의 지지를 받아 1964년 11월 2일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으로 즉위했다.[42][52] 사우드 국왕은 국가 재정 파탄과 가말 압델 나세르 암살 계획 연루 의혹 등으로 왕실의 위신을 실추시킨 상태였다.[50] 파이살은 1964년 3월 4일 섭정으로 임명된 후, 대무프티 무함마드 이븐 이브라힘 알 아쉬-셰이크의 파트와(칙령)와 왕족들의 지지로 왕위를 계승했다.[50][53] 폐위된 사우드는 망명길에 올랐다.[130]
국왕 즉위 직후 파이살은 "저를 형제이자 봉사자로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폐하'라는 칭호는 오직 신에게만 속하며 '왕좌'는 천국과 지구의 왕좌입니다."라고 연설하며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55]
그의 초기 주요 조치 중 하나는 미래의 왕위 계승 문제를 다루기 위한 위원회를 설립한 것이었다.[56] 위원회는 그의 삼촌들과 이복형제들로 구성되었다.
1967년에는 제2총리직을 신설하여 동생인 파흐드 왕자를 임명했으며,[57][58] 1973년 3월 15일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국기를 공식적으로 제정했다.[59]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주요 고문으로는 라샤드 파라온과[60] 대무프티 무함마드 이븐 이브라힘 알 아쉬-셰이크가 있었다.[61]
파이살 국왕은 통치 기간 동안 사회 개혁과 국가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급속한 발전을 이끌었다. (세부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주요 업적으로는 1969년 이슬람 회의 기구(OIC) 창설 주도, 1973년 제4차 중동 전쟁 당시 석유 무기화 정책 시행, 1974년 미국과의 협정을 통한 석유 달러 체제 확립 기여 등이 있다.[186][187][188][189][190][191][192] 이러한 국제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1974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5. 1. 근대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노예 제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파이살 국왕이 1962년 칙령을 통해 노예 제도를 전면 폐지하면서부터였다. BBC 진행자 피터 홉데이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노예 한 명당 2000USD를 지불하며 약 1,682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다.[93] 정치 분석가 브루스 리델은 1945년 압둘아지즈 국왕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회담 이후 미국이 노예 제도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2년 사우드 왕가를 설득하여 노예 제도를 폐지하게 했다고 주장했다.[54]파이살은 수상으로 재임 중이던 1962년 11월 26일, 내정의 기본 원칙이 되는 다음 10개 조항을 발표했다. 이는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질적인 헌법 역할을 하는 기본 통치법의 바탕이 되었다.
조항 | 내용 |
---|---|
1 | 코란과 순나를 국가의 법률과 행정의 기반으로 삼는다. |
2 | 지방 행정 제도를 확립한다. |
3 | 사법부(사법성)와 최고 사법 회의를 설립한다. |
4 | 프트와 공포 기구를 설립한다. |
5 | 언행을 통해 이슬람을 포교한다. |
6 | 이슬람 정신에 따라 선행을 장려하고 악행을 단속한다. |
7 | 의료 및 교육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저렴한 기본 식량을 공급하며, 사회 보험 사업단을 설립한다. |
8 | 경제 및 사회 개발을 촉진한다. |
9 | 도로 및 댐 건설 프로젝트와 수자원 개발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중·경공업을 개발하며, 석유 및 광물 자원 공단을 설립한다. |
10 |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노예를 해방한다. |
국왕 즉위 후, 파이살은 모든 사우디 왕족 자녀들을 해외 유학 대신 국내에서 교육하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는 상류층 가정들이 자녀들을 다시 왕국으로 불러들여 교육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62] 그는 또한 현재의 행정 구역 시스템을 도입하고 현대적인 복지 시스템의 기틀을 마련했다. 1970년에는 사법부를 설립하고 경제 개발을 위한 첫 번째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63] 여성 교육을 허용하고 여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지만, 이러한 개혁은 일부 보수적인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파이살의 근대화 노력 중 하나는 미디어, 출판, 기록 보관에 관한 새로운 법률 제정과 외국 및 기업 기록 보관소와의 양자 협정을 통한 문화 협력 의정서 체결이었다. 이는 20세기 중반 아라비아에 대한 기록을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45] 텔레비전 방송은 1965년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같은 해, 파이살의 조카인 칼리드 빈 무사이드 왕자가 새로 설립된 사우디 텔레비전 본부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방송 중단을 요구하며 동료들과 방송국을 습격했으나 보안 요원에 의해 사살되었다.[64] 이 사건은 훗날 파이살 국왕 암살의 주요 동기 중 하나로 지목된다.
파이살 국왕은 1969년 이슬람 회의 기구(OIC)를 창설하여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1973년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와 석유 수출국 기구(OPEC)를 주도하여 석유 가격을 4배 인상하고 사우디아라비아산 원유의 세계 시장 공급을 줄이는 등 석유를 무기화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석유 위기를 초래했다. 같은 해 12월 10일, 파이살 국왕은 중동 특사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일본의 미키 다케오 부총리와 회담하고, 일본을 우방국으로 간주하여 대일 석유 공급 제한 조치를 해제했다.[186][187] 또한, 1974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과 만나, 사우디아라비아가 달러로 결제되는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대가로 미국이 안보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협정(워싱턴-리야드 비밀 협정)을 체결하여 석유 달러 체제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88][189][190][191][192]
이러한 사회 변화와 국제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파이살 국왕은 아랍 세계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했으며, 그의 정책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현대화,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 관리, 반시온주의적 입장, 그리고 급성장하는 경제력을 통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65] 그의 종교적, 경제적 영향력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1974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5. 2. 경제 개발
파이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수입 활용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당시 아람코와의 수익 분배 협정이 불공정하다고 판단하여 철저한 평가를 거쳐 개정을 요구했다. 또한 정부는 외국 기업에게 부여하던 석유 매장지 개발 협정 참여에서 벗어나, 국가 기관에만 석유 투자 양허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전환했다.[66] 과거 정부 재정이 파산 지경에 이르렀던 상황에서, 파이살은 산업, 농업, 금융 및 경제 기업의 재활성화에 집중하며 왕국의 경제 및 행정 부흥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67]파이살은 국가의 5개년 계획 수립을 주도하고 행정 지역의 구조 설정을 시작했다. 국가 공공기관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외국 컨설팅 회사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는 산업, 농업, 프로젝트 계획, 토지 투자, 천연 자원 및 식수원 탐사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페트로민(Petromin Corporation)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광범위한 발전소 네트워크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석유화학, 철강, 시멘트, 광업과 같은 필수 산업의 창출을 이끌었다.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학생들을 서구 국가로 연수 보내는 정책을 지지했고, 이는 산업 기업 성장에 기여했다. 1969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개발 전략이 시작되었다.[68]

경제 개발을 위해 미국과의 협력도 강화했다. 1966년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과 만나 왕국 발전을 위한 공동 노력에 초점을 맞춘 사우디-미국 동맹을 구축했다. 이후 1971년 워싱턴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회담했으며, 1973년에는 사우디-미국 공동 경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74년에는 닉슨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되는 등 양국 관계의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69][70]
한편, 1962년 11월 26일 수상 재임 시절 파이살은 내정의 기본 정책으로 다음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는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기본 통치법의 바탕이 되었다.
# 코란과 순나를 국가의 법률과 행정의 기반으로 하는 것
# 지방 행정 제도의 확립
# 사법부(사법성), 최고 사법 회의의 설립
# 프트와 공포 기구의 설립
# 언행으로 이슬람의 포교
# 이슬람 정신에 따른 선행 장려 악행 단속
# 의료·교육 서비스의 무상 제공, 저렴한 기본 식량의 제공, 사회 보험 사업단의 설립# 경제·사회 개발의 촉진# 도로·댐 건설 프로젝트와 수자원 개발 프로젝트의 시행, 중·경공업의 개발, 석유·광물 자원 공단의 설립# 노예 제도의 폐지와 모든 노예의 해방
5. 3. 농업 개발
파이살 국왕은 국가 경제 부흥을 위해 산업, 농업,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재활성화에 집중했다.[67] 특히 농업 분야에서는 국가의 식량 안보와 경제 다각화를 위해 중요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1965년, 농업부는 다국적 컨설팅 회사들과 협력하여 광범위한 물 탐사 프로그램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제한된 수자원을 체계적으로 탐사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66] 농업부는 농업 기술 개선, 축산업 및 어업 육성, 고유 식물 종 보존, 사막화 방지 노력과 함께, 특히 주요 농산물인 대추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농민들에게 지도를 제공했다.[66] 또한, 대추의 포장 및 보존 시설에 대한 민간 부문의 투자를 적극 장려했다.[66]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외국 기업의 기술 지원을 받아 여러 중요한 인프라 프로젝트가 완료되었다. 대표적으로 1970년 지잔 댐(Jizan Dam)이 건설되었으며[66], 1974년에는 아바하(Abha) 댐이 완공되었다. 또한 알마즈마아(Al-Majma'ah)와 리야드 인근의 와디 하니파(Wadi Hanifa) 등지에도 빗물을 저장하기 위한 댐이 건설되었다.[66] 알아흐사 지역에서는 용수와 우물물을 보존하고 잉여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대규모 관개 및 배수 프로젝트가 시행되어 물 절약 계획을 실현하고자 했다.[66]
농업 개발은 새로운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다음 지역들에서 농업 사업이 시작되었다.[66]
주요 농업 사업 시작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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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북 주(Tabuk Province) |
알자우프 주(Al-Jawf Province) |
와디 시르한(Wadi Sirhan) |
알카심 주(Al-Qassim Province) |
알아플라즈 주(Al Aflaj Governorate) |
와디 비샤 (Wadi Bisha) |
나즈란 주(Najran Province) |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농민과 어부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도 이루어졌다. 농업부는 농업은행을 통해 농민과 어부들이 농업 및 어업 활동에 필요한 장비를 구매할 수 있도록 무이자 장기 할부 대출을 제공하도록 지시했다.[66] 이러한 정책들은 사우디아라비아 농업의 현대화와 생산성 증대에 기여했다.
5. 4. 교통 개발
파이살 국왕의 지휘 아래, 사우디아라비아 전역에 걸쳐 현대적인 도로망이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제 기업들의 전문 기술이 활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쿠웨이트와 같은 이웃 국가들과의 연결성이 향상되었다.[66] 또한 농업 도로 개발을 우선시하여, 마을과 농민들이 생산품을 시장으로 효율적으로 운송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항공 분야에서는 공항이 확장되고 개선되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항공은 제트기를 도입하여 서비스를 향상시켰다.[66] 특히, 제다에는 민간 항공 훈련 기관이 설립되었다.
해상 교통 분야에서도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제다 이슬람항이 확장되었고, 얀부와 자잔에 새로운 항구가 건설되면서 항만 교통량이 크게 증가하였다.[66]
5. 5. 교육 개발
파이살 국왕은 통치 기간 동안 교육을 국가 발전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교육 시스템 발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모든 사우디 왕족들이 자녀들을 해외 유학 대신 국내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칙령을 내려, 상류층 자제들의 국내 교육을 일반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62] 또한 1962년 11월 26일 수상으로서 발표한 10개 조항의 내정 기본 정책 선언에는 교육 서비스의 무상 제공이 포함되어, 교육 기회 확대에 대한 그의 의지를 보여주었다.파이살은 교육 과정 개혁을 단행하고 해외 교육 연수 기회를 늘렸으며, 특히 자녀 교육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한 가정을 위한 특별 지원책을 마련하여 남학생과 여학생 모두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모든 교과서는 무상으로 배포되어 학생들이 교육 관련 비용 부담 없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71]
파이살 국왕 시기에는 여러 고등 교육 기관이 설립되거나 개편되었다.
연도 | 내용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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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 킹 압둘아지즈 대학교 설립[72] | 제다 소재 |
1974년 | 이맘 무함마드 빈 사우드 이슬람 대학교 설립 지시[71] | 리야드 소재 |
1974년 | 킹 압둘아지즈 대학교 국립화 및 무상 교육 전환 명령[72] | |
1975년 | 석유광물대학을 킹 파흐드 석유광물대학교로 개편[73] | 다흐란 소재 |
1975년 | 킹 파이살 대학교 설립[74] | 알아흐사 소재, 1977년 칼리드 국왕 치세 개교 |
특히 파이살은 왕세자 시절부터 여성 교육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56년, 그의 부인인 이파트 빈트 모하마드 알 투나얀의 후원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정규 정부 여자학교인 다르 알하난(Dar Al Hanan) 설립을 주도했다. 이후 사우드 국왕 치세인 1960년에는 여성 교육 총국(General Presidency for Girls Education) 설립을 위한 왕실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교육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75] 파이살은 즉위 후에도 여성 교육을 허용하고 여자학교를 설립하는 등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지만, 이러한 변화는 보수적인 사회 일각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5. 6. 보건 개발
파이살 국왕은 보건 분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의료 시스템 발전에 힘썼다. 그는 1962년 발표한 10개 조항 선언에서도 "의료·교육 서비스의 무상 제공"을 명시하며 국가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삼았다.파이살 국왕의 지휘 아래,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의료 전문가들을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모집했다.[76] 또한, 자신이 기증한 부지에 킹 파이살 전문병원(King Faisal Specialist Hospital) 설립을 지시하여 1975년에 개원하도록 했다.[76]
국제적인 협력도 강화하여, 정부 보건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와의 관계를 긴밀히 했다.[76]
의료 시스템 기반 강화를 위해 상당한 재정 투자가 이루어졌다. 국가 예산의 3.4%가 의료 부문에 배정되었으며, 1973년 한 해에만 공중 보건 및 사회 사업 예산으로 5.91억사우디아라비아 리얄이 투입되었다.[77] 이러한 노력은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시행된 5개년 계획을 통해 체계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기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의료 서비스는 다음과 같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77]
항목 | 내용 |
---|---|
의사 수 | 1,020명으로 증가 |
보건 보조원 수 | 3,750명으로 증가 |
병원 병상 수 | 30% 증가 |
진료소 | 60% 확장 |
보건소 수 | 200개로 증가 |
이러한 성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의료 서비스 수준을 향상시키려는 파이살 국왕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77]
5. 7. 군사 개발


즉위 후 파이살 국왕은 당시의 필요와 요구에 맞춰 사우디아라비아 왕립 공군을 위한 포괄적인 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많은 사우디 학생들을 수용하고 최고 수준의 훈련을 제공할 수 있는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1967년 파이살 국왕 공군사관학교 설립을 발표했고, 1970년에 공식적으로 운영을 시작했다.[78]
군사력 강화를 위해 최첨단 무기 도입에도 힘썼다. 1965년 12월, 영국으로부터 잉글리시 일렉트릭 라이트닝 전투기 40대(단좌기 34대, 복좌기 6대)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이 전투기들은 1968년 7월 1일 제다 도착을 시작으로 1972년 6월 29일까지 순차적으로 인도되었으며, 1986년 1월까지 운용되었다.
또한 1972년에는 프랑스로부터 다쏘 미라주 5 전투기 39대를 주문했다. 그러나 이 전투기들이 1974년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착하기 전, 파이살 국왕은 이집트 공군의 전력 강화를 지원하기 위해 이 전투기들을 이집트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79]
파이살 국왕 시대에는 현대적인 군사 도시 건설도 이루어졌다. 이 도시들은 군사 기지, 훈련장, 사격장, 탄약 및 장비 보관 창고뿐만 아니라 교육, 의료, 레크리에이션, 상업 시설을 갖춘 주거 지역을 포함하는 복합 단지로 설계되었다. 군인과 그 가족들을 위한 종합적인 지원 시설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조경된 정원, 녹지 공간, 스포츠 클럽 등도 갖추었다. 최초의 군사 도시는 1971년 남부 지역 카미스 무샤이트 인근에 건설된 파이살 국왕 군사 도시였다. 이후 1973년에는 북서부 지역에 압둘아지즈 국왕 군사 도시가 건설되어 파이살 국왕이 직접 개장식에 참석하기도 했다.[80][81]
5. 8. 쿠데타 진압
1950년대와 1960년대 중동 지역에서는 수많은 쿠데타가 발생했다. 특히 1969년 리비아에서 무암마르 카다피가 왕정을 전복시킨 쿠데타는, 인구가 적고 넓은 사막 국가라는 유사성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82] 이러한 배경 속에서 파이살 국왕은 정교한 보안 기구를 구축하고 반대 의견을 단호하게 진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이러한 정책을 다른 모든 사안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적 관점에서 정당화했으며, 재위 초기에 국가의 성문 헌법 제정 요구에 대해 "우리의 헌법은 코란이다"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3]1969년 여름, 파이살 국왕은 군사 쿠데타 계획이 있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일부 장군을 포함한 수백 명의 군 장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84] 이 쿠데타 시도는 주로 공군 장교들이 계획했으며, 사우디 왕정을 전복하고 나세르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85] 파이살 국왕은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측근인 사미 샤라프가 쿠데타 음모의 배후라고 주장했다.[86] 이 대규모 체포는 미국 정보기관의 제보에 근거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82]
5. 9. 종교적 포용성

파이살 국왕은 포용적인 개혁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제한적이고 신중하게 수용하는 다원주의적 관점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65년부터 1975년까지 국가 통합 정책을 일시적으로 되살리면서 정치적 대표성을 확대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다. 파이살은 사우디아라비아 내의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했는데, 이는 주로 시아파가 거주하는 동부 알아흐사 지역, 예멘과 부족적 유대감을 가진 남서부 아시르 지역(특히 나즈란과 지잔의 이스마일파 부족), 그리고 메카를 중심으로 한 헤자즈 지역을 포함했다. 그는 메카와 지다 출신의 비와하비 계열 국제적 수니파 헤자즈인들을 사우디 정부에 포함시키기도 했다.[87] 특히 메카와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는 수니파(수피즘) 학자인 알-사이이드 알라위 이븐 압바스 알-말리키 알-하사니(알라위 알-말리키 무함마드의 아버지)의 조언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88]
1962년 수상 재임 시절에는 내정의 기본 정책으로 10개 조항을 발표했는데, 이 중 종교와 관련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코란과 순나를 국가의 법률과 행정의 기반으로 삼는다.
- 프트와(이슬람 율법 해석) 공포 기구를 설립한다.
- 언행으로 이슬람을 포교한다.
- 이슬람 정신에 따라 선행을 장려하고 악행을 단속한다.
같은 해인 1962년, 파이살은 더 넓은 범위의 종파를 초월한 범이슬람주의를 장려하며 이슬람 세계 연맹을 출범시켰다. 이 연맹에는 티자니 수피 학자 이브라힘 니아스 등이 초청되었다.[89] 그는 또한 이전 사우디 통치자들의 배타적인 견해와 달리, 사우디 국가 성직자들에게 "이집트, 인도 등 모든 무슬림들은 당신의 형제입니다"라고 선언하며 이슬람 세계의 연대를 강조했다.[90] 그러나 마이 야마니와 같은 비판가들은 파이살 통치 이후에도 종파, 부족, 지역, 성별에 따른 차별이 일상화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87]
1964년 파이살이 국왕이 된 후, 그의 즉위를 도왔던 국가 성직자(울라마)들의 역할과 권위는 점차 줄어들었다. 파이살 자신은 경건한 무슬림이었고 어머니를 통해 알 아쉬셰이크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었으며, 범아랍주의에 맞서 범이슬람주의 운동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울라마의 권력과 영향력을 제한하려 했다.[91] 그의 후계자인 칼리드 국왕과 달리, 파이살은 급진적인 성직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 최고 종교 기관인 고위 울라마 평의회와 같은 기구를 장악하거나 이슬람법을 수호하는 대무프티와 같은 종교적 직책을 맡는 것을 막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고문들은 종교적 열정가들을 자극할 경우 예상치 못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48]
파이살은 여성 교육 허용과 같은 사회 개혁을 신중하게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은 종교 보수주의자들의 큰 반발과 시위를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보수주의자들과 직접 대화하며 그들의 논리를 이용하여 사회 진보의 필요성을 설득하려 노력했다.[91][92]
한편, 왕실의 부패 문제는 이슬람 신학 대학의 종교 인사들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사우디 정권이 채택한 일부 신학적 해석에 도전했다. 당시 메디나 이슬람 대학교 학장이었던 셰이크 압둘아지즈 빈 바즈(훗날 국가의 대무프티가 됨)는 이러한 비판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였다. 파이살은 빈 바즈의 비판을 용납하지 않고 그를 직위에서 해임시켰다. 그러나 빈 바즈의 가르침은 이미 그의 제자들 일부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중 한 명이 훗날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을 일으킨 주하이만 알-오타이비였다.[93]
5. 10. 성지 관심

파이살 국왕은 이슬람 성지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여러 중요한 사업을 추진했다. 사우디 빈라딘 그룹은 메카의 마스지드 알하람 확장 공사를 맡았는데, 이는 약 1000년 만에 이루어진 대규모 확장 사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사우드 국왕 재위 시기인 1955년에 시작되어 파이살 국왕과 칼리드 국왕 재위 시절까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1967년 메카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확장 설계 방안이 논의되었는데, 파이살 국왕은 기존의 오스만 건축 양식 건물을 철거하자는 제안에 반대하며, 오히려 오스만 건축물을 보존하고 이를 새로운 건축 디자인과 조화롭게 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9년부터는 두 개의 새로운 건물을 추가하고 기존 건물을 보수하는 새로운 건설 단계가 시작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주변 도로가 정비되고 광장이 조성되었다. 당시 프로젝트에는 약 8억사우디아라비아 리얄의 비용이 투입되었다. 또한 1962년에는 예멘 내전으로 인해 이집트(당시 아랍 연합 공화국)와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자, 메카의 카바 천 제작 공장을 다시 가동하도록 명령했다.[94]
1965년에는 무슬림 세계 연맹이 이브라힘의 자리(Maqam Ibrahim) 개보수를 계획했다. 이 계획은 마캄을 수정 기둥 안에 넣고 은색 뚜껑을 씌워 보존하는 방식이었는데, 파이살 국왕은 이에 동의하고 계획 실행을 지시했다. 순례자들이 의식을 더 편리하게 치를 수 있도록 주변 건물들이 철거되었고, 1967년까지 이브라힘의 자리 주변 공간이 확장되어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순례 의식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95]
메디나의 예언자 모스크 역시 파이살 국왕의 관심 대상이었다. 1955년에 첫 번째 사우디 확장 공사가 완료된 후 순례객 수가 계속 증가하자, 파이살 국왕은 모스크 서쪽에 추가적인 예배 공간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이 공간은 1973년에 완공되어 두 번째 사우디 확장 공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사용되었다. 한편, 사우디 빈라딘 그룹은 1964년 동예루살렘에 있는 돔 오브 더 록의 복원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96]
6. 외교 정책
파이살은 1932년부터 외무장관을 맡아, 1960년부터 1962년까지의 짧은 공백을 제외하고는 사망할 때까지 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교 정책을 총괄했다.[28][25] 국왕으로서 그는 이전의 압둘아지즈 국왕이나 사우드 국왕과는 다르게 이슬람을 사우디 외교 정책의 중요한 도구로 활용했다.[97]
그는 아버지 압둘아지즈 국왕이 시작한 미국과의 긴밀한 동맹 관계를 이어갔으며, 군대의 무장과 훈련에 있어서 미국에 크게 의존했다. 국왕으로서 첫 공식 미국 방문은 1966년 6월에 이루어졌다.[36]
파이살은 확고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 어떠한 정치적 관계도 맺기를 거부했으며, 공산주의와 이슬람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98] 이러한 신념에 따라 1971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재임 시절 알 아즈하르의 대이맘인 압델 할림 마흐무드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99] 이 협정에는 4000만파운드의 예산이 배정되었다.[99]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이 파이살에게 사우디아라비아의 현대화를 촉구하며 여성의 미니스커트 착용 허용 등을 요구했을 때, 파이살은 이란 역시 대다수가 무슬림인 국가임을 상기시키며 자신은 "프랑스의 샤"가 아니라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00]
6. 1. 팔레스타인 문제

파이살 왕자는 외무장관 시절부터 팔레스타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팔레스타인 대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의 팔레스타인 문제 참여는 1938년, 아버지를 대신하여 런던 회의에 참석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에 반대하는 중요한 연설을 했다. 또한 1948년 사우디 국민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팔레스타인 투쟁의 어려움과 팔레스타인 민중의 고통을 알렸다.[101]
1939년에는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분할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런던에서 소집한 세인트 제임스 궁전 회의에 파이살과 그의 형제 할리드가 사우디아라비아 대표단으로 참석했다.[102] 이 회의에서 영국 정부는 분할 계획이 "정치적, 행정적,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비현실적이라는 정책 성명을 발표하며 사실상 계획을 거부했다.[103] 회의는 당시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이후 증가하던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104][105]
파이살은 팔레스타인 권리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 데 힘썼다. 1963년 유엔 연설에서는 팔레스타인 분할에 대한 유엔 결의가 아랍 세계의 평화를 파괴한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고, 아랍 국가들이 내부 차이를 극복하고 단결하여 팔레스타인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기구를 설립하고 전 세계 무슬림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정책을 펼쳤다.[106]
1947년 9월 22일 유엔 연설에서 파이살은 시오니즘을 강하게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아랍인들은 세계 유대인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 정치적 소수 집단인 시온주의자들의 공격을 막고자 합니다. 이 집단은 종교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며, 그 방법과 수단은 나치와 다르지 않습니다."[106]

1969년 8월 알아크사 모스크 방화 사건이 발생하자, 파이살 국왕은 즉각 대응에 나섰다. 그는 같은 해 9월 23일부터 25일까지 모로코 라바트에서 이슬람 국가 정상 회의를 소집하여 이 사건을 논의했다. 25개 이슬람 국가 지도자들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에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이 회의를 계기로 이슬람 협력 기구(OIC)가 창설되었으며, 회원국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약속했다.[107]
6. 2. 북예멘 내전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이어진 예멘 내전은 예멘 왕국의 왕당파와 예멘 아랍 공화국 지지자들 사이의 충돌이었다. 공화국은 압둘라 알살랄이 이끄는 군부 세력이 이맘 무함마드 알바드르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수립되었다. 이맘 알바드르는 사우디아라비아-예멘 국경으로 도피하여 북부 시아파 부족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되찾으려 했고, 이는 전면적인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알바드르와 왕당파를 지원했고, 이집트는 아랍연합공화국 체제 하에서 예멘 공화파를 지원했다. 이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108]1964년 9월, 파이살과 감마르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아랍 정상회담에서 만났다. 당시 이집트는 예멘에 4만 명의 병력을 파견한 상태였고, 약 1만 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두 지도자는 공식 성명을 통해 예멘 내 분쟁 해결과 평화적 결론 도달을 위해 전적으로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 선언은 아랍 세계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미국 워싱턴 D.C.에서도 "국가 원수다운 행동"이자 "오랜 내전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으로 평가했다. 파이살은 회담 후 "나세르 대통령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다"고 말하며 긍정적인 분위기를 나타냈다.[109]
1965년 8월, 나세르 대통령은 제다를 방문하여 파이살과 다시 만났다. 이는 1954년 하지를 위해 방문한 이후 처음이었다. 파이살은 나세르를 따뜻하게 맞이했으며,[110] 이틀간의 회담 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제다 협정에 합의했다.
- 10개월 이내에 예멘에서 이집트군을 점진적으로 철수한다.[110]
- 사우디아라비아는 왕당파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한다.[110]
- 모든 예멘 세력을 대표하는 50명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예멘의 미래를 결정할 국민 투표 준비를 위한 과도 정부를 구성한다.[110]
그러나 이집트 관리 사미 샤라프는 예멘의 모든 당사자들이 이 협정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아 이행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공화국 의장 압둘라 알살랄은 협정을 "예멘 아랍 공화국의 독립에 대한 노골적인 간섭"이라고 비판했고, 왕당파 역시 처음에는 지지 의사를 보였으나 결국 공화파와의 전쟁 종식을 위한 노력을 거부했다.[110]
1965년 11월 23일, 제다 협정 이행을 위해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주최로 하라드에서 회의가 열렸다.[111] 공화파 대표단은 압드 알라흐만 알이리아니 판사가, 왕당파 대표단은 외무장관 아흐메드 무함마드 알샤미가 이끌었다. 하지만 양측은 타협점을 찾지 못했고, 이는 더 많은 유혈 충돌로 이어졌다.[112]
1967년 8월, 이집트는 카르툼 결의안의 일환으로 예멘 전쟁을 중단할 의사를 밝혔다. 이집트 외무장관 마흐무드 리야드는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가 1965년 제다 협정을 갱신할 것을 제안했다. 파이살은 나세르의 제안에 만족했으며, 이맘 알바드르 역시 나세르가 약속을 지킨다면 이스라엘에 맞서 싸울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113] 나세르와 파이살은 새로운 협정에 서명했는데, 주요 내용은 나세르가 예멘에서 2만 명의 병력을 철수하고, 파이살은 알바드르에 대한 무기 공급을 중단하며, 세 개의 중립적인 아랍 국가가 감시단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이 합의에 대해 알살랄은 나세르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114]

이후 양국 관계는 개선되어, 나세르는 이집트 내 동결되었던 약 1억달러 상당의 사우디 자산을 해제했고, 파이살은 그 해 초 국유화했던 이집트 소유의 두 은행을 다시 돌려주었다.[115]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쿠웨이트는 이집트에 연간 총 2.66억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으며, 이 중 사우디아라비아가 1.54억달러를 부담했다.[116]
6. 3. 6일 전쟁

6일 전쟁 동안 파이살은 사우디아라비아군에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모든 휴가를 취소하며 왕국 북부에 병력을 동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2만 명의 사우디 군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요르단으로 이동하여 아랍군과 함께 작전에 참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전쟁 후 그는 사우디 부대가 요르단 영토 내에 주둔하여 10년 동안 필요에 따라 지원과 원조를 제공하도록 지시했다.[117][118][119]
또한, 카르툼 회의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쿠웨이트는 1967년 6월 전쟁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에 분배할 3.78억달러 규모의 기금을 조성하기로 합의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중 1.4억달러를 기부하기로 했다.[120] 그러나 파이살은 직접 참석하지 않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재정 지원 증가에 관한 전쟁에 연루된 아랍 국가들의 요청을 피하기 위해 1969년까지 아랍연맹 정상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다.[121]
파이살의 손자인 암르 빈 무함마드 알 파이살 왕자는 1967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에 함락된 사건이 파이살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척들로부터 그 사건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다시는 미소짓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가 많이 웃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는 매우 조용하고 사색적인 사람이 되었으며, 대부분 스스로 말하기보다는 경청하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122]
6. 4. 라마단 전쟁

1970년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 사망 후, 파이살은 그의 후계자인 안와르 사다트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사다트는 소련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친미 노선으로 전환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973년, 사다트가 욤 키푸르 전쟁(아랍권에서는 라마단 전쟁으로 불림)을 시작하자, 파이살 국왕은 전쟁 중 서방 국가들의 이스라엘 지원에 강력히 항의하며 사우디아라비아산 석유의 세계 시장 공급을 중단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1973년 석유 위기를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석유 금수 조치는 초기에 캐나다, 일본, 네덜란드, 영국, 미국을 대상으로 시작되었으나, 이후 포르투갈, 로디지아,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확대되었다.[123] 금수 조치가 해제된 1974년 3월까지 국제 유가는 약 300% 급등하여 배럴당 3USD 수준에서 거의 12USD까지 치솟았으며, 특히 미국의 유가는 더욱 큰 폭으로 상승했다.[124]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오일 쇼크'를 일으키며 국제 정치와 경제에 단기적,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과감한 결정은 파이살 국왕의 정치적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으며, 전 세계 아랍인과 무슬림들에게 그의 명성을 확고히 심어주었다.

석유 금수 조치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오일 달러는 파이살 국왕 사후 사우디아라비아 경제 호황의 밑거름이 되었다. 늘어난 수입을 바탕으로 파이살은 1967년 6일 전쟁[125] 이후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126]에 제공하던 원조와 보조금 규모를 대폭 확대할 수 있었다.
1969년 파이살 국왕은 이슬람 협력 기구(OIC) 창설을 주도하며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1973년 제4차 중동 전쟁 당시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와 석유 수출국 기구(OPEC)를 이끌며 석유 가격 인상과 공급 제한을 단행하여 세계적인 석유 위기를 일으켰다. 같은 해 12월 10일, 중동 특사로 파견된 일본의 미키 다케오 부총리와 회담하고 일본을 우방국으로 인정하여 석유 공급 제한 조치를 해제했다.[186][187] 또한 1974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과 만나, 사우디아라비아가 달러로 결제되는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안보를 보장받는 협정(워싱턴-리아드 비밀 협약)을 체결하여 석유 달러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188][189][190][191][192]
이러한 종교적, 경제적 영향력을 인정받아 1974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세계에서는 파이살 국왕의 석유 금수 조치가 서방 세력, 특히 미국의 반감을 사 그의 암살을 초래했다는 음모론이 널리 퍼져 있다.[127][128]
7. 개인 생활
파이살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15] 그의 배우자들은 알 카비르(Al Kabir), 알 수다이리(Al Sudairi), 알 질루위(Al Jiluwi), 알 투나얀(Al Thunayan) 등 사우디아라비아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129]
파이살의 자녀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사우디 사회와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고등학교 졸업자가 6명에 불과했던 이복형 사우드 국왕의 108명 자녀들과 대조적이다.[145][146] 파이살의 딸들은 해외에서 교육받고 전 세계 여러 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으며,[145][146] 아들들 역시 해외 유학 경험이 많았다.[147] 예를 들어, 아들 투르키는 미국 뉴저지의 명문 학교와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교육받았고,[148] 사우드는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했다.
파이살의 아들들은 사우디 정부에서 요직을 거쳤다. 장남 압둘라는 한동안 정부 직책을 맡았다. 칼리드는 30년 이상 아시르 주지사를 역임한 후 2007년 메카 주지사가 되었다. 사우드는 1975년부터 2015년까지 40년간 사우디 외무장관을 지냈다. 투르키는 사우디 정보기관 알 무카바라트 알 아아마(Al Mukhabarat Al A'amah)의 수장, 영국 대사, 미국 대사를 역임했다.[149]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아들 압둘 라흐만은 2014년 3월 사망했다. 아들 무함마드는 사업가로 활동했다.[150]
딸들 역시 사우디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라는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슈라 협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151][152] 여성 교육과 사회 문제에 대한 저명한 활동가이다. 그녀는 1962년 사우디 최초의 자선 단체 중 하나인 '알 나흐다(Al Nahda)'를 설립했고, 이 단체는 2009년 걸프 지역 인권 단체에 수여되는 최초의 샤이요 상(Chaillot prize)을 받았다.[155] 사라의 자매들인 롤로와, 라티파, 하이파 역시 여성 교육 및 사회 활동에 적극적이다.[153][24][154] 롤로와는 특히 여성 교육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하이파는 파이살의 이복형제인 술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의 아들 반다르 왕자와 결혼했다.
파이살의 손녀들도 주목할 만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함마드 왕자(사우드 국왕의 아들)와 결혼한 사라 공주의 딸인 림 빈트 무함마드(Reem bint Mohammed)는 제다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이자 갤러리 소유주이며,[156][157] 하이파 공주의 딸인 리마 빈트 반다르(Reema bint Bandar)는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여성 미국 대사로 임명되었다.[158]
7. 1. 성격과 외모
파이살은 그의 성실함, 극도의 겸손함, 친절함,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능숙하게 관계를 맺는 능력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160] 그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으며, 사치와 향락을 드러내는 것을 피했다.[160] 매사냥, 사냥, 문학, 독서, 시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매년 열리는 나즈드 축제와 기념 행사를 매우 좋아했다.[160] 그러나 국왕이 된 후 국정에 몰두하면서 장시간 일했으며, 일부 취미 활동은 뒤로 미루기도 했다.[161]대부분의 이복형제들과 달리 파이살은 English|영어eng와 French|프랑스어fra를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공식 석상에서는 아랍어로 말하는 것을 선호했다. 통역사가 실수를 하면 직접 수정하기도 했다.[159]
1964년 집권 후, 파이살은 국제 사회에서 빠르게 주목받았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인 ''뉴욕 타임스''는 그가 마치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나 할리우드 캐스팅 사무실에서 나온 인물 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159] 그의 키는 약 180cm로 당시 기준으로 평균보다 컸지만,[159] 아버지 압둘아지즈나 형 사우드 국왕만큼 크지는 않았다.[162][163] 거의 전적으로 서양식 복장을 했던 이란의 샤와 같은 다른 이슬람권 통치자들과 달리, 파이살은 외국 고위 인사들을 만날 때도 전통적인 사우디 타브를 주로 입어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159]
8. 암살과 여파
1975년 3월 25일, 파이살 국왕은 이복형제인 무사이드 빈 압둘아지즈의 아들 파이살 빈 무사이드 왕자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파이살 빈 무사이드는 미국에서 막 귀국한 상태였다. 암살은 국왕이 시민들의 청원을 직접 듣는 자리인 ''마즐리스''(Majlis, 문자 그대로 '앉는 곳')에서 일어났다.[164]
암살 당시 파이살 빈 무사이드는 대기실에서 파이살 국왕을 만나러 온 쿠웨이트 대표단과 함께 있었다. 국왕이 조카인 파이살 빈 무사이드를 포옹하고 사우디 관습에 따라 키스하려 몸을 숙이는 순간, 파이살 빈 무사이드는 권총을 꺼내 국왕에게 발사했다. 첫 총알은 국왕의 턱에, 두 번째 총알은 귀를 관통했다. 현장에 있던 경호원 한 명이 칼집에 든 칼로 파이살 빈 무사이드를 쳤고, 당시 석유 장관이었던 자키 야마니는 암살자를 죽이지 말라고 여러 차례 외쳤다.[165]
파이살 국왕은 급히 리야드 중앙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의료진이 심장 마사지와 수혈을 시도했을 때 그는 아직 살아 있었으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암살 전후로 암살자는 침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왕의 사망 이후 리야드는 3일간의 애도 기간을 가졌고, 모든 정부 활동이 중단되었다.[165] 파이살 국왕의 장례식은 리야드의 이드 모스크에서 거행되었으며,[166] 1975년 3월 26일 알 우드 묘지에 안장되었다.[167][168] 장례식에서는 새로 즉위한 동생 칼리드 국왕이 숨진 형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169]
암살 동기에 대한 한 가지 이론은 파이살 빈 무사이드의 형인 칼리드 빈 무사이드 왕자의 죽음에 대한 복수였다. 파이살 국왕은 텔레비전 설치를 포함한 세속적인 개혁을 추진했고, 이는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칼리드 왕자는 1966년[170](다른 자료에서는 1965년으로 언급하기도 한다[165]) 텔레비전 방송국을 공격하다가 경찰관에게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일부 음모론도 제기되었으나, 공식 조사 결과 파이살 빈 무사이드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 내려졌다.
다큐멘터리 ''파이살, 국왕의 유산''에서 파이살의 손자 아므르 빈 무함마드 빈 파이살은 국왕이 사망 며칠 전 세상과 거리를 두었다고 주장했다. 자키 야마니는 파이살 국왕이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고인이 된 아버지 압둘아지즈 국왕이 꿈에 나타나 차를 타고 가면서 자신에게도 타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주장했다. 야마니는 파이살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슬람 신앙에 따르면, 죽은 사람이 꿈에서 산 사람을 데려간다면, 산 사람은 아마도 짧은 시간 안에 죽게 될 것이다.[171][172]
파이살 빈 무사이드 왕자는 공격 직후 체포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공식적으로 정신 이상자로 선언되었지만, 재판 후 사우디 의료 전문가 패널은 그가 국왕을 총으로 쏠 당시 정신이 온전했다고 판단했다. 국가 최고 종교 법원은 그에게 역적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고, 그는 리야드의 데이라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참수되었다.[165]
파이살 국왕의 서거 후, 왕위는 그의 동생인 칼리드 빈 압둘아지즈가 계승했다.
9. 기념 및 유산
파이살 국왕 사후, 그의 아들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제적인 자선 단체인 파이살 국왕 재단을 설립했다.[173] 미국의 록 밴드 그레이트풀 데드는 작사가 로버트 헌터를 통해 1975년 앨범 ''알라를 위한 블루스''의 타이틀곡에서 파이살 국왕을 기렸다.[174]
파키스탄에서는 파이살 국왕을 기리는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1976년 10월 칼리드 국왕은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파이살 모스크 건설을 시작했다.[177] 파키스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던 라이알푸르는 1979년 파이살 국왕의 업적을 기려 '파이살의 도시'라는 뜻의 파이살라바드로 이름이 바뀌었다.[178][179] 신드 주의 가장 큰 도시인 카라치에서는 주요 고속도로 중 하나가 '샤라에파이살'(파이살 대로)로 명명되었고, 진나 국제공항 근처의 주택 지역은 '샤 파이살 콜로니'로 이름 붙여졌다. 또한 카라치에 있는 두 개의 주요 파키스탄 공군 기지 중 하나는 "PAF 기지 파이살"로 명명되었다.[179][180]
파이살 국왕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여러 전기가 출판되었다. 제럴드 드 고리는 ''파이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라는 제목의 전기를 썼고,[175] 러시아의 아랍학자 알렉세이 바실리예프는 2013년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 개성, 신앙 그리고 시대''를 출판했다.[5] 2019년에는 아구스티 비야롱가 감독이 파이살이 13세였던 1919년 런던 방문을 다룬 영화 ''킹으로 태어나다''가 제작되었다.[176]
10. 견해
파이살 국왕은 자신의 경력 전반에 걸쳐 팔레스타인 대의를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125] 그는 외무장관 시절부터 팔레스타인 문제에 깊이 관여했는데, 1938년 런던 회의에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고, 1948년에는 사우디 국민들에게 팔레스타인의 투쟁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했다.[101] 1939년 런던에서 열린 세인트 제임스 궁전 회의에서는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이 비실용적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 기여했다.[102][103] 1947년 9월 22일 유엔 연설에서는 시오니즘을 나치즘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했다.[106] 그는 1963년 유엔 연설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에 대한 유엔 결의가 아랍 평화를 파괴했다고 주장했으며,[106]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고 아랍 국가들의 노력을 통합하며, 팔레스타인 대표 기구 설립과 무슬림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정책을 추진했다.[106]
파이살은 확고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정치적 관계를 거부했으며, 공산주의와 이슬람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98] 이러한 입장은 미국과의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군대의 무장과 훈련에서도 미국에 크게 의존했다.[97][36] 1971년에는 이집트의 알 아즈하르 대이맘과 공산주의 퇴치를 위한 협정을 맺기도 했다.[99]
동시에 파이살은 팬이슬람주의를 지지하며 무슬림 간의 통합을 추구했다.[91] 그는 이슬람 세계 연맹을 창설하고,[89] 사우디 내 시아파, 이스마일파, 헤자즈 지역의 비와하브파 수니파 등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집단을 포용하려는 시도를 했다.[87] 메카 관련 결정 전에는 수니파(수피즘) 학자의 조언을 구했으며,[88] 티자니 수피 학자를 이슬람 세계 연맹에 초청하기도 했다.[89] 그는 사우디 국가 성직자들에게 "이집트, 인도 등 모든 무슬림들은 당신의 형제입니다"라고 선언하며 이전 통치자들과 다른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다.[90] 또한 이란 국왕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에게 이란이 무슬림 국가임을 상기시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00]
국내적으로 파이살은 경건한 무슬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 즉위 후 종교 성직자(울레마)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줄이려 시도했다.[91] 그는 급진적인 성직자들이 고위 율마 평의회와 같은 종교 기관을 장악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며,[48] 정권에 비판적인 셰이크 압둘아지즈 빈 바즈를 메디나 신학 대학 학장직에서 해임하기도 했다.[93] 동시에 그는 여성 교육 허용과 같은 신중한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은 종교 보수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파이살은 대화를 통해 그들을 설득하려 노력했다.[91][92] 그는 다원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정치적 대표성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이는 일시적으로 국가 통합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87]
11. 훈장
파이살은 집권 전후 방문한 여러 국가로부터 많은 훈장을 받았다.[182] 파이살에게 수여된 훈장과 상들은 1983년 파이살 국왕 재단이 설립한 리야드의 파이살 국왕 연구 및 이슬람 연구 센터에 전시되어 있다.[173][182]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국가 | 훈장 | 훈장명 및 등급 |
---|---|---|
아프가니스탄 | ![]() | 최고 태양 훈장 목걸이[182] |
독립 훈장[182] | ||
벨기에 | ![]() | 레오폴드 훈장 대십자장[182] |
차드 | 차드 국가 훈장 대십자장[182] | |
이집트 | ![]() | 이스마일 훈장[182] |
나일 훈장 대숙위장[182] | ||
나일 훈장 목걸이[182] | ||
프랑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장[182] | |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장교장[182] | ||
그리스 | ![]() | 조지 1세 훈장 대십자장[182] |
기니 | ![]() | 국가 공훈 훈장 대십자장[182] |
인도네시아 | 인도네시아 공화국 훈장 1등급[182] | |
이란 | 왕관 훈장 (1953)[183] | |
파흘라비 훈장[182] | ||
타지 훈장[182] | ||
이라크 | ![]() | 두 강 훈장[182] |
파이살 1세 훈장[182] | ||
이탈리아 | 이탈리아 왕관 훈장 대십자 기사장[182] | |
일본 | 국화 훈장 대숙위장[182] | |
요르단 | ![]() | 알-후세인 빈 알리 훈장 목걸이[182] |
르네상스 최고 훈장 대숙위장 (2회)[182] | ||
레바논 | ![]() | 레바논향백 국가 훈장 대숙위장[182] |
라이베리아 | ![]() | 라이베리아 개척자 훈장 대숙위장[182] |
리비아 | ![]() | 이드리스 1세 훈장 대목걸이[182] |
말레이시아 | 왕국 훈장[182] | |
모리타니 | ![]() | 국가 공훈 훈장[182] |
모로코 | 무함마드 훈장 목걸이[182] | |
네덜란드 | 오라녜-나사우 훈장 대십자 기사장[182] | |
니제르 | ![]() | 니제르 훈장 대십자장[182] |
![]() | 공훈 훈장 대십자장[182] | |
오만 | ![]() | 오만 훈장(군사) 목걸이[182] |
폴란드 |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훈장 별장[182] | |
파키스탄 | ![]() | 니샨-에-임티아즈[182] |
![]() | 니샨-에-파키스탄[182] | |
사우디아라비아 | ![]() | 압둘아지즈 국왕 훈장[184] |
세네갈 | ![]() | 국가 공훈 훈장 대십자장[182] |
소말리아 | ![]() | 소말리아 별 훈장 목걸이[182] |
대한민국 | ![]() | 수교훈장 1등급 (광화대장)[182] |
스페인 | 시민 공로 훈장 목걸이[182] | |
수단 | ![]() | 명예 목걸이[182] |
시리아 | ![]() | 우마이야 훈장 1등급 회원[182] |
타이완 (중화민국) | ![]() | 옥관 훈장 대숙위장[185] |
광화 훈장 특별 대숙위장[185] | ||
튀니지 | 영광 훈장 대숙위장[182] | |
독립 훈장 목걸이[182] | ||
터키 | 금색 적신월 메달[182] | |
우간다 | ![]() | 나일의 근원 훈장 1등급[182] |
영국 | ![]() | 왕립 빅토리아 연쇄 훈장[182] |
대영 제국 훈장 대십자 기사장[182] | ||
성 미카엘과 성 조지 훈장 2등급[182] | ||
자이르 | 표범 국가 훈장 대숙위장[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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